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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는, 동료 과학자들이 꼭 필요하지 않은 여행까지 종종 포함해서 전문적 교류를 위해 정기적으로 외국에 나가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료 과학자들은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가서 자신들의 업적을 마케팅'하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 문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우리 과학자들은 국내에서는 절망적일 정도로 평범할 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즉, 동료 과학자들은 사실은 국내형 인간과 국제형 인간이라는 두개의 인간을 한 몸뚱아리 안에 갖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국내형 인간'은 청구대금을 지불하고, 긴 통근 시간에 시달리고, 정부(어느 나라든)에 대해 불평을 하며, 쓰레기를 밖으로 내놓는 등의 일을 하는 반면, '국제형 인간'은 이웃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지적(知的)인 일을 하고, 8시간의 시차가 나는 곳에 있는 사람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정기적으로 장거리를 날아가기도 한다. 비행기 탑승구는 오직 국제형 인간만이 통과할 수 있는 장벽이었다.
되돌아 보건대, 이러한 두가지 자아(self)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대의 공통적 경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처음엔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국제형 인간이 국내형 인간과 주로 구별되는 점은 영어를 사용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영어권 국가에서 자란 사람들은 ' 국제적 자아'를 함께 가지고 있고, 그 심리적 측면도 근본적으로는 같지만, 우리 머리 속의 두 자아를 구별짓는 차이점은 훨씬 미묘해서 성격적 특성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 쉽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과학자들에게만 독특한 것은 아니다. 현대 교육의 중심 목표 중하나는 젊은이들을 국제인으로 활약할 수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는 미국 같이 큰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국내 시장이 작고 물건을 해외에 팔아 성장하는 한국 같은 나라는 특히 그렇다. 필요할 때에 국제형 인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계화'가 진정 의미하는 바다. 이는 또한 온 세상의 부모들이 영어 교육에 사로잡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은 결코 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들을 비행기 탑승구를 통해 해외로 내보내는 것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린 자녀들을 너무 일찍, 너무 적극적으로 국제화시키는 것에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즉 어린이들은 그러한 두 자아(국내형 인간과 국제형 인간)를 공존시키면서 탈 없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화해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조국을 상실한 인간으로 자라나게 된다. 나는 해외에 있는 한국인, 특히 과학기술 공부를 하는 한국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많이 봐왔다. 그들은 전문분야에서는 매우 뛰어나지만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해서는 대책없는 혼돈상태에 빠져있다. 나는 이를 한국의 문화적 요인보다는 한국에서 특히 악명높은 강압적 교육의 부작용 탓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다.
'국제형 인간'이란, 형편 좋을 때만 친구일 뿐 진짜 어려움이 닥칠 때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가상의 인간이라는 점을, 아이들은 자라면서 알아차리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전에는 그렇게 우습게 얕보았던 자그마한 고향 마을이 사실은 멋진 곳이란 점을 발견하는 것과 흡사하다.
작은 나라 국민이건 큰 나라 국민이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국제 세계로 나가는 관문을 드나들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건전하고 균형잡힌 생활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정말 중요한 것들-따뜻한 가정과 가족, 그리고 좋은 흙냄새 따위-로 이따금씩 되돌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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